나이를 한 살씩 더 먹어가면서 철학에 관심이 생기던 찰나에 조금씩 관심이 가던 철학자가 생겼다. 바로, 서강대 명예교수 최진석이다. 

 

좌파 우파, 진보 보수 등 진영논리에 대한 인터뷰한 기사를 보고 요약과 내 생각을 정리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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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영에 갇혀 쪼개진 대한민국, 우린 생각해야 산다”

“지금 진영 간의 분열과 대립, 갈등은 우리 역사상 가장 심해졌어요. 나라가 가장 심하게 분열돼 있다는 거죠. 진영에 갇히는 건 생각하는 능력이 없기 때문이에요. 진영에 갇히면 생각할 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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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진영 간의 분열과 대립, 갈등은 우리 역사상 가장 심해졌어요. 나라가 가장 심하게 분열돼 있다는 거죠. 진영에 갇히는 건 생각하는 능력이 없기 때문이에요. 진영에 갇히면 생각할 필요가 없어요. 진영에서 이미 만들어진 논리와 이념을 그대로 재생산하면 되거든요. 모두에게 물어보고 싶어요. 당신은 당신의 삶을 사느냐, 진영의 삶을 사느냐, 당신 자신은 어디 있는가.”

 

나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내 생각은 어디에 있는가.....

 

답변하기 쉽지 않은 질문이다.

 

 

교수신문은 2020년 사자성어를 "아시타비(我是他非·나는 옳고 남은 틀렸다)"를 선정했다. 내로남불을 한자 사자성어로 만든 신조어다. 교수신문이 전국 대학교수 906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설문조사에서 아시타비(我是他非)가 32.4%로 1위를, 후안무치’(厚颜無耻)가 21.6%로 2위를 차지했다. [1]

 

 

 

코로나 이후의 시대정신은 선도국가로 도약하는 것에 방향을 맞춰야 합니다. 과거에 가장 강력한 팬데믹이었던 페스트를 계기로 중세가 극복되고 르네상스가 시작됐잖아요.

 

 

우리나라는 한계에 갇힌 지 이미 오래됐어요. 한계에 갇혔다는 말은 익숙한 방식으로 가능한 가장 높은 곳에 이미 도달했다는 뜻도 되죠. 박근혜 대통령을 부정하면서 문재인 대통령이 등장했는데 박 대통령 때 있었던 많은 문제가 똑같은 형태로 다시 등장했어요. 우리는 수평적 왕복 운동만 하고 있어요. 수평적 왕복 운동을 멈추고 수직적 상승을 해야 합니다. 수직적 상승의 한 형태가 중진국을 벗어나서 선도국가로 도약하는 겁니다. 중진국까지는 생각하는 능력이나 창의성이 크게 요구되지 않아요. 생각의 결과, 탐험의 결과, 창의의 결과를 따라가기만 하면 되거든요. 선도국가는 자기가 스스로 생각을 해야 하죠. 창의성을 발휘해야 합니다. 쉽지 않은 변화예요.

 

"수평적 왕복운동"만 하고 있다는 점에 적극동의한다. 

요즘 즐겨보는 축구에도 상대방의 체력을 소진시키고 빈 공간을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수평적 움직임이 아닌 수직적 움직임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역사에서 1820년대를 대분기(大分岐), Great Divergence 라고 합니다. 이때 만들어진 선진국과 후진국의 차이가 지금까지 쭉 이어지고 있어요. 당시의 선진국이 후진국으로 떨어진 예가 없고, 후진국이 선진국으로 올라선 예도 거의 없어요. 따라가는 삶을 사느냐 생각하는 삶을 사느냐 이 큰 차이 때문에 간격이 좁혀지지 않죠. 그런데 이 간격을 확 좁힌 나라가 있어요. 산업화와 민주화를 모두 이룬 대한민국이거든요. 세계에서 유일해요.

그런데 간격을 좁힌 것이지 아직 선진국으로 올라서지 못했어요. 양적으로 보면 선도국가라고 할 정도가 됐지만, 사유의 방식이 선도국가형으로 바뀌지 않았거든요. 그런데 우리나라에 기회가 왔어요. 과거의 패러다임이 깨지고 4차 산업혁명이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바뀌는 이때에 마침 또 우리 국력이 제일 강해요. 선도국가로 올라서겠다는 의욕을 가진다면 지금이 기회죠. 지금밖에 없어요.

지금 이 기회를 잡지 않으면 앞으로 몇백년 동안은 기회가 없어요. 어떤 특정한 패러다임에서 상하가 결정되면 뒤집기가 쉽지 않거든요. 그러니까 저는 안타까운 게 민주화를 성공시키고 난 이후 너무 긴 시간 동안 민주화 다음으로 건너가지 못했다는 거예요. 이제는 건너가 볼 수 있는 때인데 어떻게 도약할 수 있는가를 궁리하지 않고 계속 극단적인 분열 속에서 국력을 낭비하고 있어요.

 

 

1820년 대분기 때 만들어진 선진국과 후진국의 차이가 지금까지 쭉 이어지고 있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되었다. 1820년이면 우리나라는 조선시대 순조 20년이다. 순조 20년 전후로는 이런 일들이 있었다. [2]

 

1800년   7월 순조 조선 제 23대 임금으로 등극
1801년   공노비 해방
1801년   천주교 금지령
1802년   김조순의 여식 순원왕후 간택
1811년   홍경래의 난
1827년   효명세자 (익종) 대리청정
1834년   11월 헌종 조선 제 24대 임금 등극
1836년   남응용의 모반사건
1844년   민진용의 옥
1845년   영국 군함 불법 측량 후 퇴거
1846년   프랑스 세실제독 함대가 국서 전달
1849년   6월 철종 조선 제25대 임금으로 등극
1860년   동학 탄생
1862년   진주 민란
1863년 12월 고종 조선 제 26대 임금 등극

 

 

 

저는 김대중 대통령 이후로 국가 리더십이 반쪽의 역사 리더십, 진영의 리더십에 갇혀 있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우리는 과거가 한 점 오점 없이 완벽하게 해결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그것이 모든 사람을 과거에 묶어 놓고 말거든요. 과거의 문제를 과거의 시각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 게 큰 오류예요. 과거는 미래로 해결하는 거예요. 미래를 어떻게 건설하느냐가 과거를 어떻게 해결하느냐와 같은 말이거든요. 역사에서는 적폐를 청산하다가 새로운 적폐가 돼버리는 경우가 많아요. 반동적 현상이죠. 과거 문제를 미래의 시선으로 해결하지 않으면 자기 스스로 적폐가 되는 모순을 범할 수 있죠.

 

과거의 문제는 미래의 시선으로 해결해야 한다. 

 

 

혁명은 명(命)이 바뀌는 거예요. 어젠다, 구조가 바뀌는 거예요. 저는 촛불혁명은 실패했다고 말했는데, 이유는 이런 거예요. 정권이 언론을 장악하는 게 적폐였어요. 그러면 언론장악이 사라져야 해요. 그래야 혁명이거든요. 정권의 검찰 장악이 적폐였어요. 그러면 검찰 장악이 사라져야 하거든요. 그래야 혁명이죠. 혁명의 대상들이 과거에 했던 일이 혁명 후에 안 일어나는 게 혁명이죠. 그런데 그런 일들이 그대로 다시 나타나고 있습니다. 또 무슨 일만 생기면 법을 만들어 제어하려고 해요. 

5·18 역사왜곡처벌법처럼요. 법을 남용하거나 임의로 적용하면서 법치를 흔들고, 법에 의한 통치가 아니라 법을 이용한 통치로 전락하고, 그러면서 표현의 자유가 침해되고 민주와 자유가 오히려 후퇴했어요. 그래서 우리는 지금 역사 퇴행을 겪고 있습니다.

저는 정치에 포획된 5·18을 정치로부터 해방시키고 싶은 거예요. 그래야 5‧18이 살거든요. 그런데 5‧18을 법에 가두는 일을 비판하면서 그분들의 아픔 그대로를 담을 수 없었던 거죠. 그래서 죄송하다고 한 거예요.

 

혁명은 명(命)이 바뀌는 것이다.... 혁명이라는 단어를 함부로 사용하면 안되겠다는 생각이 든다. 혁명을 한다는 것은 과거의 문제가 다시 나타나서는 안되는 것이다. 그리고 법으로 뭐든 통제하고 제어하려 하는 것은 나도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국가는 국방과 조세라는 두 기둥으로 서 있고, 정치와 교육이라는 두 톱니바퀴가 작동해서 움직입니다. 그래서 교육을 통해서 정치 역량이 형성되고, 정치는 교육에 굉장히 강력한 환경을 제공합니다.

분열과 갈등이 심하면 이것을 해결할 수 있는 환경을 정치에서 제공해야 해요. 그런데 지금 우리나라의 정치는 오히려 분열을 이용하고 있어요. 정치 환경이 변화되지 않고는 정치인들이 분열을 통해 얻는 기능적인 효과를 버리려고 하지 않을 거예요. 멀리 보면 공멸의 길이지만, 언뜻 보면 자기 진영을 더 공고히 하거나 단기적인 승리를 거두는 효과가 있는 것처럼 보이거든요. 정치공작만 남고 정치는 망가지는 것이죠.

우리나라는 한 나라 두 국민이 된 지 오래예요. 해방 때부터 진영들의 싸움이 있었죠. 김구와 이승만의 싸움이 아직도 안 끝난 것 아니에요? 지금은 대통령 비서실장이 반대세력을 향해 살인자라고 할 정도로 진영 간의 대립이 극단화됐어요. 적대감이 증오의 단계까지 갔고, 권력은 한쪽 진영에 갇혀 오히려 이 분열을 조장하고 이용하면서 행사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어요. 결국은 생각하는 능력, 반성 능력, 각성 능력이 훈련되지 않아서입니다.

교육이 사실은 고도의 정치 행위이기도 해요. 왜냐하면, 정치도 인재가 하는 거예요. 미래도 인재가 여는 거예요. 정치와 교육은 국가를 작동시키는 두 톱니바퀴여서 굉장히 가깝게 있어요. 지금 정치가 진영에 갇혀있는 건 교육에서 생각하는 인재를 공급하지 않았기 때문이에요. 그러니까 정치의 실패는 교육의 실패, 정치가 혼란스럽다는 건 교육이 혼란스럽다는 말을 반드시 함축하죠.

 

국가의 기둥과 톱니바퀴에 대해 생각해본다.

정치의 역할에 대해서도 곱씹어본다.

 

생각해보니 1945년 해방이후 우리나라는 계속 진영의 싸움이 지배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아니... 고려시대 무신정변, 조선시대 붕당정치(동인, 서인) 등 아주 오래전부터 지속된 싸움이다. 이 싸움이 멈췄던 적은, 강력한 왕권(태종 등)으로 통치를 하거나 전쟁 중이라고 생각한다. 

 

교육기관이 생각하는 인재를 공급하지 않는 것일까... 생각하는 사람이 공급되기를 바라지 않는 것일까...?

 

 

진영 싸움에서 벗어날 방법은, 생각하는 능력을 빨리 회복해야 해요. 생각이라는 것은 궁금증과 호기심을 기반으로 하거든요. 궁금증과 호기심은 항상 밖을 향해 열려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생각하는 사람은 개방적이에요.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폐쇄적이죠. 그런데 우리는 지금 폐쇄화가 극단화돼 있어요.

생각하는 능력이 있어야 나는 누구인지, 나는 무엇을 원하는지, 나는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 나는 어떻게 살다 가고 싶은지를 묻게 됩니다.

 

궁금증과 호기심. 개방적인 사고.

 

 

왕정에서 생각은 왕만 했어요. 다른 사람들은 왕의 생각을 집행만 하면 돼요.

민주정이라는 것은 생각을 구성원들이 한다는 거거든요. 유권자가 자신의 생각을 국회의원들한테 대행시키는 거예요. 구성원들이 생각하는 능력을 갖지 않으면 민주주의는 불가능해요. 지금 우리의 민주주의가 왜 후퇴하느냐, 사람들이 리더의 생각을 수행하려고 하지 자기 생각을 리더한테 대행시키려 하지 않거든요.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에도 나와요. 독재자 ‘나폴레옹은 언제나 옳다’고 하면서 나머지 구성원들은 생각을 포기하죠. 나폴레옹만 생각하고, 나머지는 이 생각을 수행만 합니다. 왕정 독재와 다를 바가 없게 됩니다. 생각을 포기하면, 바로 노예로 전락합니다.

 

민주는 구성원이 생각하고 그 생각을 선출자들에게 대행을 시키는 것이다. 구성원들이 생각하지 않고 리더의 생각을 따르기만 하면, 민주주의가 아니다. 생각을 포기하면, 노예로 전락한다.

 

 

저는 다른 사람이 좋아하는 제가 되고 싶은 마음은 하나도 없어요. 나는 내가 좋아하는 내가 되고 싶어요. 그래서 지금 내가 하는 일은 내가 좋아하는 내가 사는 방식이에요. 짧은 인생을 누구 좋으라고 살아요? 나 좋으라고 사는 거지.

저는 철학자로 살거나 철학자로 인정받고 싶은 마음도 없어요. 나는 나로 살다가 나한테 인정받으면 충분해요. 저는 그저 나를 향해서 걸을 뿐이에요.

 

내가 좋아하는 내가 되고, 나를 향해 걷는 내가 되려면, 제일 위에서 던진 질문에 대답을 해야 한다.

 

나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내 생각은 어디에 있는가.....

 

 

 

애정 어린 비판이라고 감성적으로 표현하고 싶지는 않아요. 비판은 그냥 비판인 거죠. 저는 비판 대상들에게 애정은 없고, 대한민국에만 애정이 있어요.

우리가 해결해야 할 문제 중 하나는 편 가르기예요. 우리는 알게 모르게 진보니 보수니 하는 프레임에 가두는 일을 해요. 그러면 언어들이 발화되는 순간 정치화돼버려요. 그러면 어떤 치료 효과도 나지 않죠. 프레임을 공유하는 진영의 문제로 작아진 후 휘발돼버리죠.

말을 해야 할 때 아무 말도 안 했다는 것보다 했다는 기록 하나라도 남긴다는 게 내가 나를 스스로 증명하는 한 방식이거든요. 나한테 떳떳하고 싶으니까.

 

과연 나의 비판 대상 누구이며, 나의 애정은 어디에 있는지 생각해 볼 문제이다. 감정이 태도를 지배해서는 안된다.

 

 

새 시대 리더십은 기품과 생각하는 능력이 있어야 해요.

기품이라는 것은 절제할 수 있다는 겁니다. 절제할 수 있다는 것은 염치와 수치심을 안다는 거예요. 염치를 알고 수치심을 가지면 최소한 거짓말은 하지 않습니다.

우리 정치권에서는 거짓말이 너무 일상화됐어요. 염치를 알면 권력도 남용하지 않죠. 진영에서 벗어나 국가 레벨의 미래 어젠다를 설정하는 건 생각하는 능력을 갖고 있는 사람에게만 가능합니다.

 

기품과 생각하는 능력.

절제하고 염치와 수치심을 안다는 것.

거짓말을 하지 않는 것.

 

 

내가 리더는 아니지만, 나도 가져봐야겠다.

 

 

 

도움이 된 소중한 글들

[1] www.kyosu.net/news/articleView.html?idxno=59131

[2] ko.wikipedia.org/wiki/%EC%A1%B0%EC%84%A0_%EC%8B%9C%EB%8C%80_%EC%97%B0%ED%91%9C

 

 

 

많은 생각을 하게되는 글이다.

 

2021.01.07. 코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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