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최근 "2·28민주운동"의 국가기념일 지정과 관련된 언론보도가 자주 나오고 있다. 2·28민주운동의 국가기념일 지정은 대구경북 을 연고로 한 첫 번째 국가기념일이며, 민주화운동 관련으로는 3·15의거 기념일, 4·19혁명 기념일, 5·18민주화운동 기념일, 6·10민주항쟁기념일에 이어 5번째이다. 4·19, 5·18 등과 함께 당당히 민주화운동으로 인정을 받은 것이다.

 

권영진 대구시장은 "2·28 민주운동 국가기념일 지정을 250만 대구시민과 함께 진심으로 환영한다. 2·28 정신을 헌법 전문과 역사 교과서에 반영할 수 있도록 정치권 등과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대구에서 태어나서 계속 살아오고 있지만 2·28 민주운동에 대한 관심이 적었기에 이번 국가기념일 지정을 기회로 2·28 민주운동에 대해 정리해보고자 한다.

 

 

 

요약2)

"2·28민주운동"은 "2·28 대구 학생의거", "228운동" 등의 이름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승만 정권 시절인 1960년 2월 28일, 3.15 대선을 앞두고 자유당 독재에 항거, 대구시에서 일어난 학생의거로 이후 마산의 3·15 마산시위로 이어졌고, 4·19혁명의 도화선이 된 사건이다. 

 

 

 

배경2)

 

- 1952년 발췌 개헌: 이승만 대통령이 자신의 재선을 확실히 하고 독재정권 기반을 굳히기 위해 한국전쟁 중에 임시 수도인 부산에서 군경들이 국회의사당을 포위한 가운데 국회의원들이 기립하는 방식으로 투표하여 통과시킨 개헌

 

- 1954년 사사오입 개헌: 이승만의 종신 집권을 가능하게 하기 위하여 "초대 대통령에 한해 중임 제한을 없앤다"를 골자로 한 개헌으로 표결 결과 재적인원 203명의 가결정족수(2/3이상) 136명에 1명 모자란 135명으로 부결되었다. 하지만, 203명의 2/3은 135.33명으로 정족수는 이 보다 많아야 하지만 사사오입(반올림) 하는 것이 맞다는 주장을 내세워 정족수를 135명으로 하여 가결된 것으로 정정 선포함

 

- 1958년 진보당 사건: 대한민국 검찰이 진보당 간부들을 국가반란 혐의 및 간첩죄로 기소하고 사형시킨 사건

 

- 위와 같은 사건들로 이승만 정권에 대한 국민들의 불만이 극에 달한 상황이었다.

 

 

 

전개2), 3)

 

- 1906년 2월 28일 일요일, 야당(민주당) 대통령 후보의 연설이 수성못에서 예정되어 있어 대구 및 전국의 이목이 집중돼 여당인 자유당의 감시에도 많은 인파가 몰릴 것으로 예상되었다. 

 

- 선거에서의 패배를 예감한 자유당 정권은 학생들이 유세장으로 몰릴 것을 우려한 나머지 대구시내 공립고등학교에 일요일 등교를 지시했다. 임시시험을 친다거나 영화 관람과 토끼사냥 등의 황당한 이유를 핑계로 들었다.

 

- 하루 전인 2월 27일 토요일, 경북고, 대구고, 경북대 사대부고 학생 8명이 부당한 일요일 등교지시에 항의하기 위하여 시위를 조직했다. 다음날인 2월 28일 일요일 오후 1시, 학생 800여명이 반월당을 거쳐 경상북도청으로 가는 과정에서 다른 학교 학생들이 합류하여 시위규모가 커졌다. 경북도청을 거쳐 대구시청, 자유당 경북도 당사, 경북지사 관사 등을 돌며 자유당 정권의 악행을 규탄했다. 경북고, 대구고, 경북대 사대부고, 대구상고(현 상원고), 대구농고(현 자연과학고), 대구공고, 경북여고, 대구여고 등 8개 고등학교 학생들이 주체였다.

 

- 학생들의 결의문 : 백만 학도여, 피가 있거든 우리의 신성한 권리를 위하여 서슴지 말고 일어서라. 학도들의 붉은 피가 지금 이 순간에도 뛰놀고 있으며, 정의에 배반되는 불의를 쳐부수기 위해 이 목숨 다할 때까지 투쟁하는 것이 우리의 기백이며, 정의감에 입각한 이성의 호소인 것이다.

 

- 당시 경상북도지사는 "이 놈들은 전부 공산당"이라고 말한 반면, 시민들은 구타당하는 학생을 경찰에게 달려들어 말기거나 박수를 치기도 하고 학생들을 숨겨주기도 했다.

 

- 1,200여명이 시위에 참가했고 그 중 120여명이 체포되었다. 하지만 경찰은 시위가 번질 것을 우려해 주동자 일부를 제외하고 대부분 석방하였다.

 

 

 

의의2)

 

- 2.28 운동은 고교생들이 주체이고, 계획적 조직 시위의 민족운동 요건을 갖춘 학생 운동이었다.

 

- 우리 역사상 1926년 6·10 만세운동, 1929년 광주 학생 항일 운동에 이은 의거로 전후 학생 운동의 효시가 되기도 했다. 특히 4·19혁명의 도화선으로 독재 정권을 무너뜨리는(이승만 하야) 결정적인 계기를 만들었으며, 한일 수교 반대와 그 이후 민주화 운동에 큰 영향력을 미쳤다.

 

 

 

기념사업2)

 

<사진1. 2017년 제57주년 2·28민주운동기념식1) - 2·28학생의거기념탑 광장>

 

- 1961년 4월 10일, 매일신문이 주관하여 대구시민 성금으로 명덕로터리에 2·28대구학생기념탑을 세웠으며, 이를 1990년 2월 28일 명덕로터리에서 현재위치인 두류공원으로 이전하였다.

- 1999년 2월 28일 문희갑 대구시장은 대구광역시 중구 공평동에 위치한 대구중앙초등학교 부지를 2·28민주의거기념공원(현 2·28기념중앙공원)으로 조성하였다.

- 2018년 2월 6일 국가기념일로 지정되었다. 2018년 2월 28일 치러지는 기념식은 국가보훈처 주관으로 성대하게 열릴 예정이다.

 

 

 

 

출처 및 참고자료

1) 대문사진 : 2·28민주운동기념사업회 홈페이지

2) https://ko.wikipedia.org/wiki/2%C2%B728_%EB%8C%80%EA%B5%AC_%ED%95%99%EC%83%9D%EC%9D%98%EA%B1%B0

3) http://www.228.or.kr/minju1.html?cate=minju1

 

관련언론보도

- http://news.joins.com/article/22351692

- 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8/02/06/0200000000AKR20180206085000053.HTML?input=1195m

 

 

 

2018.02.08. 코리.

 

 

+ Recent posts